인간은 오래전부터 자연의 원리에서 모든 것을 배우고 이를 생활에 응용해 왔다. 따라서 인류 최초의 시간제도는 낮과 밤의 반복에서부터 출발하였다. 낮과 밤으로 이루어진 하루는 원시시대부터 중요한 시간의 단위였다. 나아가 달이 차고 이즈러짐을 보고 월이라는 시간단위를 깨달았으며, 주기적인 강의 범람과 사계절의 정확한 순환을 통해 일년의 주기를 알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 달의 운행을 기준으로 한 태음력과, 태양의 연주운동을 기준으로 한 태양력이 나타났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캘린더는 1582년 로마교황 그레고리 13세가 만든 그레고리력에 기준을 두고 있다.
라틴어의 Calendarium에 어원을 두고 있는 캘린더는, 과거에서 미래로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우리 생활에 편리하도록 월 . 일 . 절후 등으로 나누어서 나타낸 일종의 시간제도이다. 캘린더는 날짜, 요일 등의 시령을 알게해주는 기본적인 기능에서 출발했지만 이것이 각 가정이나 사무실에 거의 필수적으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주위환경과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장식적 기능이 중요시 되었으며, 기업의 입장에서는 광고 홍보매체로 활용할 수 있는 판촉물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캘린더의 발전사는 디자인의 발전사와 직결되고 있으며, 가장 자연스럽게 기업과 디자인을 접목시켰던 매체로써 캘린더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캘린더가 가지고 있는 일회성의 속성 때문인지 지난 과거속에서 전통과의 연계성을 찾을 수도 없으며, 기록으로 보존된 자료도 거의 없다. 그러나 누구가에 의해서는 사라진 흔적을 찾고 잊혀진 기억을 되살려서라도 부분적으로나마 이를 정리하고 기록하여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지난날 불모지였던 일러스트레이션이 지금의 위치까지 부상하는데 있어서 캘린더가 차지해온 비중은 그 어느 매체보다도 크고 그 기여도 또한 높기 때문이다.
캘린더는 디자인과 일러스트레이션이 갖는 기능성과 장식성을 가장 자연스럽게 기업과 접목시킬 수 있는 매체라는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일러스트레이션의 수용과 정착과정이 어느 매체보다도 손쉽게 이루어졌다 하겠다.
우리나라 캘린더 디자인이 구조적 . 개념적으로 변모를 보이면서 모양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실상 1960년을 전후해서이다. 그래픽디자인이라는 용어의 등장, 대학의 디자인학과 신설, 디자인 그룹전과 개인전, 시위적인 성격을 강하게 띤 대학의 교내미전 등, 국내에서 교육받은 디자인 1세대의 등장과 그들의 활동으로 적극적으로 그 활로를 모색했지만 아직 미분화, 미전문화의 시대였다. 또한 사회적 여건은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목표로 해외 수출시장의 확대에 박차를 가하면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친 새로운 변화를 수반했던 시기였다. 따라서 광고나 홍보의 필요성이 점차 인식되기 시작했고 은행 . 제약회사 등에서는 전문디자이너를 채용, 캘린더, 리프렛 . 포스터 등을 제작하여 홍보수단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특히 은행이나 보험회사처럼 실체화된 상품을 광고하기 곤란한 서비스 업종에서는 연중 행사로써 캘린더 제작에 가장 큰 비중을 두었다. 당시에 대부분 캘린더의 그림은 동양화로 장식되었고 그것이 통례처럼 생각되었다. 동양화는 오랫동안 사람들 눈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다양한 계층에 배포하더라도 거부반응이 적고, 캘린더 원고로 사용한 후에는 소장품으로 재산 목록에 등재되기 때문에 기업의 입장에서는 일거양득의 효과가 있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지금같은 미술시장이 형성되지 않아 그림매매가 활발하지 못했기에 그당시 잘 알려진 대가급 작가들의 작품도 저렴한 가격으로 손쉽게 구입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 꽤 오랫동안 되풀이 되면서 캘린더 양산에 따른 질의 저하와 작가들의 과다한 작품 경쟁을 낳기도 했다.
오랫동안 자신의 화풍을 지켜왔던 작가들 중에는 화풍을 바꾸어가면서까지 캘린더 원고 의뢰자의 요구에 응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이유로해서 동양화가 우리나라 캘린더 발전의 초기에 있어 커다란 역할을 해온 것만은 간괴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당시 동양화 일색의 천편일률적인 캘린더가 주종을 이루는 가운데서도 디자이너에 의한 일러스트레이션 중심의 캘린더가 한두 점 눈에 띠기도 했다. 서울미대 응용미술과 재학생들의 작품을 모은 장8절 정도의 소형 캘린더와 동인염색가공주식회사에서 시도한 일러스트레이션 중심의 캘린더는 신선한 충격이다. 동양화가 박래현씨의 그림을 닮은 것 같은 일러스트레이션과 동인염색가공주식회사에 근무했던 임이섭씨(45년전에 시카고로 이민한 디자이너)의 독특한 일러스트레이션은 우리나라 캘린더 디자인사에서 하나의 여명기를 장식하였다고 생각한다.
60년대 중반에 이르러 수출산업의 신장과 소수 디자이너들이 열심히 외쳐왔던 디자인의 중요성이 서서히 되돌아오면서 관주도하의 디자인센터가 설립되고 국전규모의 상공미술전람회가 태동하게 되었다. 상공미전(현 산업디자인전)은 초기 주최측의 의도한 바 목적과는 무관하게, 그당시 디자인의 잡다한 개념을 실험하는 장으로 활용되었다.
1회전의 출품작은 수출과는 거리가 먼 책표지 . 캘린더 . 레코드자켓 등이 다수 출품되었으며 이를 과감히 수용하여 디자인의 새로우 활로를 개척하였다. 이는 상업미술 부문의 최고상인 경제기획원 장관상이 캘린더 디자인 부문에 주어졌다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 당시 수상작인 유재우씨의 캘린더 디자인은 주최측이 기대한 수출에 기여하는 미술이라는 점에서는 미흡하였다. 그러나 탁월한 테크닉과 풍부한 작품성, 어느 기업에서도 부담없이 사용할 수 있는 한국적인 소재로 캘린더 이전에 일러스트레이션의 무한한 가능성을 제시한 작품이었다.
그후 각 대학의 교내미전, 산미협회 공모전 등에서도 캘린더를 위한 일러스트레이션은 어느 매체 보다도 출품수가 많았으며 그 표현기법 역시 다양하게 나타났다. 이러한 경향은 이땅에서 서양화나 동양화에 비해 늦게 출발한 디자인이 그 나름의 뚜렷한 방법을 갖지 못한 것처럼 일러스트레이션 역시 미술과 디자인의 중간 영역에서 불명확한 개념으로 표류했음을 보여준다. 이때 등장한 캘린더라는 매체는 회화의 다양한 테크닉을 구사할 수도 있으면서 일러스트레이션 목적인 기능성(기록성 . 해학성 . 풍자성 . 사실성)을 충족시킬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해서 일러스트레이션이 제3의 미술로서 그 당위성을 인정받고 이를 확대시켜 나가는데 크게 기여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일러스트레이션이 첫 걸음을 내딛는 과정에 있어서 캘린더 일러스트레이션은 가장 중요한 매체로서 그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우리나라 캘린더에서 가장 획기적인 발전의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KBS TV가 개최한 캘린더 콘테스트와 미스 캘린더 콘테스트를 꼽을 수 있다. KBS TV에서 70년년대 중반까지 매년 연말에 실시한 본 행사는 각 기업에서 제작한 캘린더 경진대회와 직장 미인선발대회를 겸한 것이었다. 당시 본 행사에 대한 기업의 관심도는 대단해서 캘린더 제작의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콘테스트 수상을 의식하게 되면서 각 기업은 지금까지의 안일한 제작방법을 전면수정하여 동양화나 사진 일색일색에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캘린더의 종이 크기도 종전의 4절에서 장6절, 4절, 반절 등으로 다양하게 변형되고, 인쇄방법이나 지질면에서도 고급화를 추구하게 되었다. 캘린더 하단의 광고 사이즈도 점점 축소되어 홍보효과 보다도 장식성에 치중하게 되었고, 숫자의 배열방법이나 글자체의 선택 등도 디자인 차원에서 다듬어지기 시작하였다.
또한 캘린더의 형식도 포스터식, 메모식, 일력식 등으로 나뉘어졌고, 매수도 365매짜리부터 4매, 6매, 12매 등으로 다양화 되었다. 종이의 지질에 있어서도 그림의 성격에 따라서 광택지인 아트지 중심에서 스노우화이트지나 엠보싱지 등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변화에 수반하여 캘린더의 기획단계가 제작단계 못지않게 중요시 되면서 수상을 겨냥한 갖가지 방향이 다각도로 표현되었다. 디자이너에 의한 일러스트레이션이 새로운 방향의 하나로 등장하게 된것도 이러한 경향에서였다.
KBS의 캘린더 콘테스트는 해가 거듭할수록 그 경쟁이 치열해져서 동양화나 평범한 사진 중심의 캘린더는 크게 관심을 끌지 못하였다. 캘린더의 평가기준에서 디자인 측면이 강조되면서 창조성이나 독청선이 중요시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진의 처리방법이나 동양화의 소재도 달라졌으며, 본격적인 일러스트레이션으로 꾸며진 캘린더가 선을 보이기 시작했다.
KBS의 캘린더 콘테스트는 우리나라 캘린더 발전에 미친 지대한 공헌에도 불구하고 기업간의 과열 경쟁과 끊임없는 잡음 등으로 1975년 막을 내리고 말았다. 한가지 예로, 대상 수상 캘린더의 경우는 대상수상기념 스탬프를 찍어 증판하여 배부할 정도였다. 아무튼 질의 평가 기준이 모호했던 초창기 KBS의 캘린더 콘테스트는 일러스트레이션의 신식을 새롭게 하고 이를 확산 보급시키는데 기여했다.
이후에 우리나라 디자인계는 보다 숙성된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광고산업의 발달과 대기업의 광고산업참여, 각종 잡지의 출간과 기업의 사보 출간에 따른 매체의 증대와 편집디자인의 중요성 인식, 한국 타이포 그래피에 대한 관심도, 디자인 프로덕션의 증가, 기업이미지재고에 따른 CI 붐 등 숙성된 여건 속에서 디자인은 그 영역을 확대하고 분화하여 비주얼 커뮤니케이션 전반에 걸쳐 영행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우라나라 캘린더의 발전사는 디자인의 발전사와 직결되고 있으며, 가장 자연스럽게 기업과 디자인이 접목되었던 매체로써 캘린더는 아직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여러 가지 광고 매체 중 1년 내내 소비자와 친근하게 접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는 캘린더. 오랫동안 인간의 삶과 함께 해온 캘린더는 이제 날짜 전달의 단순기능을 떠나 기업과 소비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고차원적인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최근의 캘린더를 보면 언어화된 커뮤니케이션으로써의 역할을 인식, 합리적인 의도화 과정을 통해 캘린더를 제작하고 있음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다.
캘린더에 대한 연구는 기업과 제작자, 그리고 소비자의 테두리안에서 계속 이루어져야 한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기업의 이미지를 소비자에게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가를, 제작자의 입장에서는 기업의 요구를 시각적으로 차별화시켜 기업과 소비자를 자연스럽게 연결시킬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차원에서 캘린더의 제작이 시작되어야할 것이다. 왜냐하면 기업이나 제작자 모두가 소비자를 지향하는 마케팅 정책의 중요성에는 공감대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